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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주인간이야기/피플

[피플]34년째 봉사 외길… 2만가구 넘게 반찬 나눔

by 맑음:D 2021. 6. 26.

[제55회 청룡봉사상] 仁賞 이상기씨
“남에게 먼저 베풀자” 6시 기상, 반찬 만들어 어려운 이웃과 나눠
“아무리 피곤해도 제 마음이 흐뭇”

 

출처: 조선일보(2021.06.22 / 조우진기자)

 

 

 

경기도 시흥시의 한 체육관 식당에서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이상기(60)씨가 미소 짓고 있다. 반찬 나눔 등 34년째 봉사한 공로로 55회 청룡봉사상을 받는 이씨는 “지난해 하루도 쉬지 않고 반찬을 만들어 나눴다”며 “재미있기에 할 수 있었다”고 했다. /LG

 

“건강은 말짱해요. 가끔 이렇게 다쳐서 입원하는 것 말고는…. 갈비뼈 부러진 날도 반찬 만들고 다 했는데요, 뭐.” 반찬 나눔 등 34년째 봉사한 공로로 55회 청룡봉사상 인(仁)상 수상자로 결정된 이상기(60)씨는 기자가 전화를 건 지난 17일 경기도 시흥시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갈비뼈 골절 때문이다. 이씨는 지난 4월 반찬 재료를 옮기다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당시 2주간 입원했다 퇴원했는데, 이후 현장을 뛰어다니다 다시 상태가 안 좋아져 또 병원 신세를 진 것이다. 이씨는 21일 퇴원했다.

이씨의 기상 시간은 매일 오전 6시. 시흥시의 한 체육관 지하 식당 조리실에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내내 자원봉사자 20여명과 돼지고기 장조림, 멸치볶음, 무 장아찌 등을 만들어 포장한다. 사정이 어려운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이다. 하루 평균 100가구를 다니며 반찬 배달을 마치고 오후 7시가 돼서야 집으로 향한다. 혼자 사는 노인, 조손 가정, 청년들끼리 모여 사는 집 등 현재까지 2만 가구 넘는 집에서 이씨의 반찬을 먹었다. 비용은 복지 단체·지방 자치 단체 후원과 고춧가루·양념 같은 기부 물품 등으로 충당한다. 비용이 초과하면 이씨의 사비(私費)도 보탠다.

천주교 신자인 이씨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서 꾸준히 봉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20세부터 5년간 병원 원무과 등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 24세에 결혼한 이후 전업주부가 됐다. “딸이 미숙아로 태어나 많이 아팠어요. 기도하려고 충북의 꽃동네에 갔는데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남에게 먼저 베풀자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봉사에 나섰다. 어려운 가정에 반찬을 만들어 나눠주기 시작했고 인근 중·고등학교의 비행 청소년, 한부모 자녀 등 돌봄이 필요한 청소년 상담에도 나섰다. 독학으로 청소년상담사 자격증까지 땄다. 2009년에는 ‘나눔자리문화공동체’란 지역 봉사 단체를 만들었다. 사무실은 청소년 공부방, 어르신 사랑방 등으로 개방했다. 이런 봉사가 올해로 34년째다. 봉사의 계기가 됐던 자녀들은 모두 장성해 이씨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사무실 월세는 딸이 전부 부담한다. 아들은 아침 출근길에 체육관까지 태워다주고, 김장할 때는 딸·아들뿐 아니라 며느리까지 총출동한다.

 

코로나가 확산한 지난해 이씨는 더 바빴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반찬을 만들었다”고 했다. 코로나로 경로당·복지관이 문을 닫아 무료 급식이 줄면서, 이씨가 반찬을 전해줘야 할 집도 늘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엔 두 달에 걸쳐 김장을 했다. 2300가구에 각각 10㎏씩 김치를 나눠줬다. 이씨는 “밤 11시에도 집에서 나가 절여놓은 배추를 뒤집고 돌아왔다”고 했다.

이씨는 병원에 입원해서도 수퍼마켓에 전화해 다음 날 반찬 재료를 꼼꼼히 챙겼다. 그는 “다른 봉사자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내가 전화해야 수퍼에서 시들시들한거 빼고 신경 써서 신선한 재료로 보내준다”며 웃었다. 병상에 앉았지만 이웃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 듯했다. 그는 반찬 봉사를 하다가도, 종종 육수를 잔뜩 끓여 한 재래시장에 있는 노숙인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러 간다. 요즘엔 10~20대 청소년·청년들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차비도 없이, 어디 도움도 못 청하고 집에만 있는 아이들도 많아요. 자기 가난한 모습을 누구한테 내보이지 않으려 하니까요.”

봉사 단체 사무실에는 그가 만든 반찬으로 꽉 찬 냉장고가 3개나 있다. “봉사자들이 반찬을 가져다주면 아이들 자존심이 상할 수 있으니, 그냥 냉장고에서 가져가라고 둔 것”이라고 했다. 반찬이 필요한데 쭈뼛거리는 아이들이 있으면, “훌륭한 사람 돼서 내가 할머니 됐을 때 용돈 주면 되지 않느냐”고 농담을 건넨다.

‘오랜 봉사의 원동력이 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반찬을 만들고 나면 왠지 흐뭇하고 마음이 풀려요. 저는 이 일이 진짜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니까. 반찬에 그런 마음을 담은 것뿐이에요.”